스파이시한 힘과 섬세함이 공존하는 포도, 쉬라즈의 진짜 얼굴
와인을 처음 접할 때 “쉬라즈는 진하고 강하다”라는 말을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누군가는 쉬라즈를 부담스러운 레드 와인으로 기억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한 번 빠지면 헤어나오기 힘든 매력적인 품종으로 꼽는다. 이 상반된 인식의 이유는 무엇일까. 쉬라즈는 단순히 ‘강한 와인’이라는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 꽤 복합적인 이야기를 품고 있다.

이름부터 두 개인 포도, 그 시작은 어디였을까
쉬라즈는 프랑스에서는 시라(Syrah)라는 이름으로 불려 왔다. 오랫동안 페르시아의 도시 ‘시라즈’에서 유래했다는 전설이 떠돌았지만, 현대의 DNA 연구는 이 품종이 프랑스 남동부 론(Rhône) 지역 토착 품종임을 밝혀냈다. 이름은 중동을 연상시키지만, 뿌리는 유럽 땅에 깊게 박혀 있었던 셈이다.
이 포도가 전 세계적으로 ‘쉬라즈’라는 이름으로 더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는 호주였다. 프랑스에서 건너온 시라가 호주의 강렬한 햇빛과 토양을 만나 전혀 다른 성격을 드러냈고, 현지에서는 이를 쉬라즈라 부르며 하나의 스타일로 확립했다. 이후 ‘시라 vs 쉬라즈’라는 표현이 생길 만큼, 같은 품종이 지역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인상을 주게 된다.
기후가 바뀌면 성격도 달라진다
프랑스 론 지역의 시라
프랑스 북부 론에서는 비교적 서늘한 기후 덕분에 절제된 구조감이 강조된다. 검은 후추, 올리브, 훈제 고기 같은 향이 두드러지고, 바디감은 중간 정도지만 산도가 살아 있어 음식과의 조화가 뛰어나다. 이 지역의 시라는 ‘힘’보다는 ‘균형’으로 기억된다.
호주에서 꽃핀 쉬라즈
반면 호주 바로사 밸리나 맥라렌 베일의 쉬라즈는 훨씬 직관적이다. 잘 익은 블랙베리, 자두 잼, 초콜릿, 바닐라 같은 풍미가 풍부하게 펼쳐진다. 알코올 도수와 바디감이 높아 한 모금만으로도 존재감을 확실히 느낄 수 있다. 같은 포도지만, 기후와 양조 철학이 맛의 방향을 완전히 바꿔 놓는다.
맛과 향을 이해하면 쉬라즈가 편해진다
쉬라즈를 처음 마셨을 때 “후추 맛이 난다”고 표현하는 사람이 많다. 이는 이 품종의 대표적인 특징 중 하나다. 여기에 검은 과실의 농밀한 향, 가죽이나 스모키한 뉘앙스가 겹치며 복합적인 인상을 만든다.
바디감은 대체로 중간에서 풀 바디에 속하고, 타닌은 분명하지만 거칠기보다는 단단한 편이다. 산도는 지역에 따라 차이가 크지만, 너무 무겁게만 느껴지지 않도록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이 구조 덕분에 쉬라즈는 숙성 잠재력도 뛰어난 품종으로 평가받는다.
어떤 음식과 함께할 때 가장 빛날까
쉬라즈는 단독으로 마셔도 충분히 만족스럽지만, 음식과 만났을 때 진가가 더 잘 드러난다. 후추와 스파이스 풍미 덕분에 양고기, 바비큐, 스테이크 같은 육류 요리와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호주 스타일 쉬라즈는 달콤한 소스를 곁들인 그릴 요리와도 잘 맞고, 프랑스 스타일 시라는 허브를 사용한 요리와 좋은 균형을 이룬다.
추운 계절, 천천히 식사를 즐기는 저녁 자리라면 이 품종의 매력이 한층 더 또렷해진다.
쉬라즈는 초보자에게 어려운 와인일까?
의외로 그렇지 않다. 특히 과실 풍미가 풍부한 스타일의 쉬라즈는 맛을 이해하기 쉬워 레드 와인 입문자에게도 친절하다. “드라이한 와인은 어렵다”는 선입견을 가진 사람에게 쉬라즈의 농익은 과일 향은 훌륭한 다리 역할을 한다.
다만 타닌과 알코올감이 높은 스타일도 있으므로, 처음이라면 비교적 부드러운 스타일이나 너무 오래 숙성되지 않은 와인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
이런 취향이라면 특히 잘 맞는다
쉬라즈는 섬세한 꽃향보다 깊고 진한 풍미를 선호하는 사람에게 잘 맞는다. 커피, 다크 초콜릿, 향신료 향을 좋아하거나, 한 잔의 와인으로 분위기를 확실히 만들고 싶은 날에 선택하기 좋다. “와인은 가볍기보다 인상적이어야 한다”고 느끼는 타입이라면 쉬라즈의 팬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 품종으로 만들어진 상징적인 와인들
쉬라즈는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은 와인들을 다수 탄생시켰다. 프랑스 북부 론의 전통적인 시라 와인들은 오랜 숙성 끝에 복합미를 극대화하며, 호주의 아이코닉한 쉬라즈들은 농축미와 파워로 세계 시장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이들 와인은 단순히 ‘비싼 와인’이 아니라, 쉬라즈가 어디까지 표현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기준점으로 자주 언급된다.
강렬함 뒤에 숨은 또 다른 얼굴
흥미로운 점은 쉬라즈가 항상 거칠고 강하기만 한 품종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재배 수확 시기, 오크 사용 여부, 양조 방식에 따라 놀라울 만큼 우아한 스타일도 만들어진다. 그래서 업계에서는 쉬라즈를 “양면적인 포도”라고 부르기도 한다. 같은 품종으로 이렇게 다양한 성격을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이, 오랫동안 와인 애호가들의 관심을 끌어온 이유다.
쉬라즈는 한 문장으로 정의하기 어려운 포도 품종이다. 강렬함과 섬세함, 직관성과 복합미가 공존한다. 만약 지금까지 쉬라즈를 단순히 ‘무거운 레드 와인’으로만 기억하고 있었다면, 그건 이 품종의 아주 일부만 경험한 것일지도 모른다. 어느 날의 식사, 어느 지역의 스타일에 따라 쉬라즈는 전혀 다른 표정으로 잔 속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